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벌휴 이사금 (문단 편집) == 생애 == 《[[삼국사기]]》에 따르면 벌휴 이사금이 [[바람]]과 [[구름]]을 점쳐 [[홍수]], [[가뭄]], [[풍흉]]을 예지했으며, 사람의 정직함과 바르지 못함을 꿰뚫어 봐 '''성인'''으로 불렸다고 한다. 또한 아달라 이사금의 왕비 내례부인이 벌휴 이사금의 차남 석이매와 정분이 난 걸로 추정되는 기록[* 내해 이사금의 부모는 아버지가 석이매, 어머니가 내례부인으로 적혀 있다. 이 내례부인이 아달라 이사금의 왕비 내례부인과 동일 인물인지 동명이인인지는 알 수 없다.]이 있는 등 [[왕위]] 계승에 있어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대중역사가 [[박영규(1966)|박영규]]의 해석에 따르면 [[경주 석씨|석씨]]계가 [[탈해 이사금|석탈해]] 이후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면서 [[정치]]보다는 주로 [[제사]]를 지내는 신관 [[가문]]으로 바뀌었다가 신진 세력인 [[김알지]] 계열 [[경주 김씨|김씨]]계가 석씨계와 연계해 [[지마 이사금]](제6대)의 딸인 내례부인과 같은 [[박(성씨)|박씨]]계 일부의 지지를 받아 당시 왕을 몰아내고, 새로이 벌휴 이사금을 왕으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벌휴 이사금이 탈해 이사금의 신성성을 빌어 왕위에 오른 것으로 해석한다. 보통 한 [[왕조]]의 건국자들이 미화되는 것을 추정해 보면 '성인'이라는 서술도 그런 맥락으로 추측된다. 어쨌거나 당시 신라는 아직 [[제정분리]]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은 확실하며, 아달라 이사금의 재위 기간 마지막 10년 부분이 비어있다는 점을 봐도 정치적인 혼란이 있었던 것이 명백해 보인다. 재위 기간이 신라 초기 국왕치고는 다소 짧은 12년인데 그가 적지 않는 나이에 즉위했음을 암시한다. 재위 기간이 짧은 만큼 역사 기록도 상대적으로 적지만 그 중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것은 [[백제]]와의 [[전쟁]]이다. 참고로 석씨 세력이 박씨 세력을 밀어낼 만큼 당시에 힘이 있었기 때문인지 석씨 시대가 시작되면서 신라는 이전 박씨 시대보다 군사 활동의 범위가 [[경주시|경주]] 근처에서 [[경상도]] 이곳저곳으로 훨씬 넓어지고, 여러 소국을 정복해 급격하게 세력을 확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185년에 [[파진찬]] 김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삼아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으로 추정되는 소문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정벌하기도 했다. 일단 앞서에서도 확인되지만, 백제와의 전쟁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 초기 신라사의 기년 문제가 두드러짐과 동시에, 백제사와 견주어 실제 일어났을 사건의 연대 추정 또한 가능하다. 188년에 백제군이 먼저 서쪽 변경을 공격했는데 [[미추 이사금]]의 아버지인 파진찬 김구도가 막았고, 189년에는 김구도가 반격해 구양에서 백제군을 격파해 500여 명을 죽였으며, 190년에 백제가 서쪽 국경의 원산향(경상북도 [[예천군]] 추정)을 공격하고, 부곡성(경상북도 [[군위군]] 추정)을 공격할 때는 김구도가 [[기병]] 500명을 이끌고 백제군과 싸웠으나 백제군의 도망가는 척 하다 [[기습]]하는 전술에 말려들어 대패했다. 그 결과 왕은 김구도에게 책임을 물어 [[벼슬]]을 깎아 부곡성주로 삼고, 설지를 좌군주로 임명했는데 김구도가 부곡성주가 되었다는 기록을 보아 부곡성을 뺏기지는 않은 것 같다. 아님 뺏겼어도 후에 되찾았든가. 일단 백제 같은 경우, 충북 내륙부를 넘어 경북까지 찔러보는 게 가능해진 건, 충남북 내륙부에 그 영향력을 유지하던 [[목지국]]을 3세기 후반에 타도한 시기 이후로 해석된다. 과거엔 아래로 거느리던 거수국인 백제의 밑에 강제로 들어간 목지국은 그 후에도 4세기 중반까진 저항을 멈추진 않았으나, 일단 백제군이 충북 일대를 넘어 경북 일대까지 드나들 수 있었던 시기는 목지국의 권위가 없어져버린 3세기 후반 이후로 제한된다. 그러니 위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3세기 후반~4세기 초반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벌휴 이사금의 할아버지 석탈해가 실제로는 3세기 초반 혹은 중반 인물로 해석되는 신라사의 최근 동향과 다시 맞물리게 되는 것이다. 한편 김구도는 이 때부터 조용히 있었는지 기록이 없다가 나중에 아들이 왕이 된 뒤 [[갈문왕]]으로 추증된다. 192년에 [[왜]]인 1,000여 명이 [[기아(동음이의어)|기아]]로 신라에 피난을 와 [[식량]]을 구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도 실제로 있었다면, 문헌상 기록인 192년보다는 대단히 나중에 벌어진 일로 해석됨이 마땅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